[번역] 임박한 생태적 파국과 그것을 피하기 위한 혁명적 방책에 대한 13개의 테제

* 프랑스계 브라질인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사회학자, 철학자인 미셸 뢰비가 작년 초에 발표한 생태사회주의에 관한 테제를 번역해보았습니다. 이미 한국어 번역이 있지만 기존 번역에 군데군데 오역이 보이고, 생태사회주의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되어, 오역을 교정해서 다시 번역해보았습니다. (책방 들락날락 번역모임)

* 원문 : https://blogs.mediapart.fr/michael-lowy/blog/230120/xiii-theses-sur-la-catastrophe-ecologique-imminente-et-les-moyens-de-leviter

미셸 뢰비

1. 생태위기는 이미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회·정치 문제이며, 몇 개월, 몇 년 내로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지구의 미래와 에 따른 인류의 미래는 향후 수십 년 내에 결정될 것이다. 과학자들이 계산을 통해 제시한 2100년까지의 시나리오는 두 가지 이유로 별로 유용하지 않다.* ① 과학적 이유 : 계산하기 어려운 모든 역행효과들을 고려하면, 한 세기 뒤의 일을 예측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② 정치적 이유 : 21세기 말이 되면, 우리는 물론 우리 아이들과 손자들도 모두 죽고 없을 텐데, 대체 누가 신경을 쓰겠는가?

* IPCC(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는 2018년 2100년까지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에 비해 1.5도 이상 상승하는 것을 억제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채택한바 있다. ― 옮긴이

2. IPCC(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가 설명한 대로, 평균 기온이 산업시대 이전보다 1.5도 올라간다면 돌이킬 수 없는 기후 변화 과정*이 시작될 위험이 있다. 생태위기에는 위험한 결과를 낳는 여러 측면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기후 문제는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무서운 위협이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보면, 오스트레일리아에서와 같은 대화재의 급증, 강이 사라지고 육지가 사막화되는 현상, 극지방 빙하의 용해와 위치변화, 수십 미터에 이를 수 있는 해수면 상승 등이다. 그러나 해수면이 2미터만 상승해도 방글라데시, 인도, 태국의 광범위한 지역들은 물론 홍콩, 캘커타, 베네치아, 암스테르담, 상하이, 런던, 뉴욕, 리우데자네이루 같은 인류 문명의 대도시들이 바다 밑으로 사라질 것이다. 기온이 얼마나 올라갈 것인가? 지구상의 인간의 삶은 과연 몇 도부터 위협받을 것인가? 아무도 이 물음들의 답을 모른다.

* 온라인에 공유되고 있는 일부 영어번역본에는 process 뒤에 1이 붙어있지만, 프랑스어 원문이나 다른 번역본에는 없다. 게시자의 실수로 보인다. ― 옮긴이

3. 이는 인류 역사에 전례 없는 파국을 불러올 위험들이다. 기후 변화로 미래에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것과 비슷한 기후 환경을 찾으려면 수백만 년 전 플리오세(Pliocene)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지질학자들은 지구 환경이 인간의 활동 때문에 변형된 새로운 지질시대인 인류세에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활동? 무슨 활동을 말하는가? 기후변화는 18세기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됐지만, 그것이 질적 도약을 이룬 것은 1945년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다시 말해, 현대 자본주의 산업 문명이야말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의 농도 증가의 원인이며, 따라서 지구 온난화의 원인인 것이다.

4. 임박한 파국의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는 사실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성직자들에게 보내는 회칙 “찬미 받으소서(Laudato Si)”에서 “자본주의”라는 단어는 말하지 않지만, 오로지 “이윤 최대화의 원리”에만 기초하는 영리 관계 및 소유 관계의 구조적으로 왜곡된 체제야말로 사회적 불평등과 우리 공동의 집(Common House)인 자연을 파괴하는 원인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생태주의 시위에서는 “기후가 아니라 체제를 바꿔라!”라는 구호가 세계 보편적으로 외쳐지고 있다. 이 체제의 주요 대표자들, 현상유지(business as usual)*의 옹호자들, 즉 억만장자, 은행가, “전문가”, 과두지배층,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루이 15세가 했다는 “내가 죽은 뒤에 홍수가 나든 무슨 상관이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 business as usual에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인위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배출이 예상되는 온실가스의 총량”, 즉 “온실가스 배출량 전망치”라는 뜻도 있다. 중의적인 표현이다. ― 옮긴이

5. 이것이 체제의 본질적인 문제라는 것은 정부들의 행위가 비참하게 예증한다. (극히 드문 예외를 빼면) 모든 정부가 자본축적, 다국적기업, 화석연료 과두세력, 일반적인 상품화, 자유 무역을 위해 복무하고 있다. 그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자이르 보우소나로, 스콧 모리슨(오스트레일리아) 등 일부는 노골적으로 환경을 파괴하고, 기후변화를 부정한다. 반면 다른 “합리적인” 정부들은 연례 COP(당사국 총회Conference of the Parties인지 정기적으로 열리는 서커스Circuses Organised Periodically의 약자인지?) 회의에서 분위기를 잡지만, 이 회의는 막연한 “녹색” 말잔치와 완전한 무력함을 특징으로 한다.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파리 회의였는데, 배출량 감축에 동참하겠다는 모든 정부의 엄숙한 약속들로 마무리되었지만, 소수 태평양 섬나라들을 빼면 아무도 지키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이 약속을 지킨다 해도 기온이 3.3도 올라갈 거라고 계산한다.

6. “녹색 자본주의”, “탄소시장”, “보상 메커니즘”을 비롯한 소위 “지속가능한 시장경제”의 여타 조정 조치들이 완전히 쓸모없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 “녹색화”가 맹렬히 진행되는 사이 오히려 배출량은 치솟고, 파국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생산주의, 소비주의, “시장 점유율”을 위한 격렬한 투쟁, 그리고 자본축적과 이윤최대화에 전적으로 몰두하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생태위기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도 없다. 근본적으로 뒤틀린 자본주의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생태적 균형의 파괴와 생태계의 파괴로 이어진다.

7. 파국을 피할 수 있는 효과적인 대안들은 오직 급진적인 대안들뿐이다. “급진적”이라는 것은 악의 뿌리를 공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그 뿌리라면, 우리에겐 반체제적인 대안들, 즉 생태사회주의 — 21세기의 과제들에 걸맞는 생태주의적 사회주의 — 같은 반자본주의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에코페미니즘, 사회적 생태주의(머레이 북친), 앙드레 고르스의 정치적 생태주의나 탈성장은 생태사회주의와 많은 공통점이 있으며, 최근 몇 년 동안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고 있다.

8.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집단적인 전유를 통해 생산관계를 변화시켜 생산력들이 자유롭게 발전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태사회주의는 마르크스를 수용하고 있지만, 이런 생산주의 모델과는 명확히 단절한다. 물론 집단적인 전유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생산력들 자체도 다음과 같은 조치를 통해 변화되어야 한다. ① (화석 연료 대신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 에너지원의 변화. ② 지구 전체의 에너지 소비를 줄이기. ③ 상품 생산을 줄이고(“탈성장”), 무용하고(광고) 유해한(살충제, 전쟁 무기) 생산 활동을 없애기. ④ 의도적으로 제품을 구식화시키는 일의 중지. 생태사회주의는 소비 모델, 운송형태, 도시화, “생활방식”의 변화도 수반한다. 요컨대 생태사회주의는 소유형태의 변화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그것은 연대와 평등, 자연에 대한 존중이라는 가치에 기초한 문명의 변화이다. 생태사회주의 문명은 생산주의 및 소비주의와 단절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사회, 정치, 오락, 예술, 성애 등의 활동에 더 많은 자유 시간을 투여할 것을 지지한다. 마르크스는 이런 목표를 “자유의 왕국”이라는 말로 제시했다.

9. 생태사회주의로 이행을 이룩하기 위해, 실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한편 지구의 생태적 균형을 존중해야 한다는 두 가지 기준에 따른 민주적 계획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시장이 만들어낸 광고 세례와 소비 강박이 없어지면, 자신들의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인민 자신이 될 것이다. 생태사회주의는 인민 계급들의 민주적 합리성에 모든 것을 건다.

10. 이는 진정한 사회 혁명을 요구한다. 이런 혁명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생태사회주의 계획을 실현하려면 부분적인 개혁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발터 벤야민이 “역사 개념에 대한 테제”의 여백에 쓴 글귀를 인용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는 아주 다를지 모른다. 혁명은 기차를 타고 달리는 인간들이 비상브레이크를 잡아당기는 행위일 수도 있다.”* 21세기 언어로 번역하면, 우리는 모두 현대 산업 자본주의 문명이라는 자살 열차에 타고 있는 승객이다. 이 열차는 기후위기라는 재앙의 벼랑 끝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혁명적 행동은 열차를 멈추는 것을 목적한다. 너무 늦기 전에.

* 발터 벤야민 선집 5권,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관련 노트, p.356 참조 ― 옮긴이

11. 생태사회주의는 미래를 위한 계획임과 동시에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투쟁의 전략이기도 하다. “조건이 무르익기를” 기다려야할 이유는 전혀 없다. 사회적 투쟁과 생태적 투쟁의 수렴을 유도하면서 자본에 복무하는 권력들이 추진하는 가장 파괴적인 계획들과 싸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나오미 클라인이 블로카디아*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운동 속에서 투쟁 시기에 반자본주의 의식과 생태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녹색뉴딜 같은 제안들은 화석에너지를 실질적으로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그 급진적인 형태에서는 이런 투쟁의 일부가 되겠지만, “녹색 자본주의”를 재생시키는데 국한된다면 그럴 수 없다.

* “블로카디아(Blockadia)”란 채광 및 가스 채취 사업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흔히 “땅속에 있는 것을 건드리지 말라! (Keep It in the Ground”)는 구호로 대표된다. ― 옮긴이

12. 이 투쟁의 주체는 누구인가? 이전 세기의 노동자주의/산업주의 도그마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지금 전선 앞에 있는 세력은 청년, 여성, 토착민, 농민들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의 커다란 원천 가운데 하나인 그레타 툰베리의 호소로 시작된 젊은이들의 거대한 반란에 여성들은 적극 참여하고 있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이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것처럼, 여성들이 이 운동에 이토록 많이 참여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체제가 환경에 미친 피해에 가장 먼저 희생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여기저기에서 노동조합들도 이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결국 우리는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도시와 시골의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 체제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각 운동에서 첫 번째 조건은 (탄광이나 유정, 화력발전소 등을 폐쇄시키는) 생태운동의 목표를 관련 노동자들의 고용보장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13. 너무 늦기 전에 이 투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있을까? 재앙은 불가피하고 어떤 저항도 부질없다고 아우성치는 이른바 “붕괴론자들(collapsologists)”과 달리 우리는 미래가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 미래가 생태 친화적으로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는 파스칼적인 의미에서 내기의 대상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힘을 “결과가 불확실한 노력”에 투여한다. 그러나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크고도 단순한 지혜로 말했듯이 “투쟁하는 자는 패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투쟁하지 않는 자는 이미 패배한 것이다.”

2020년 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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